《월간사진》 2026년 2월호에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월간사진 발행인 김영섭의 초대석
문화지원사업팀 최은광 인터뷰
사진은 무엇을 말할 수 있으며, 무엇까지 침묵해야 하는가. 이번 인터뷰에서 최은광은 사진을 단순한 기록이나 재현의 도구가 아닌, 진실에 접근하는 하나의 언어로 사유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서 사진이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제도·시장·기술의 조건 속에서 예술의 자유가 어떻게 협상되는지를 철학적 질문과 함께 풀어낸다. 비트겐슈타인, 리처트 로티, 하버마스에 이르는 사유의 흐름을 통해 그는 사진이 진실을 ‘증명’하기보다 감각하고 드러내는 매체임을 강조하며, 오늘날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사진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를 조용하지만 단단한 언어로 제시한다.
미학과 철학을 동시에 전공하신 이력은 드뭅니다. 이미지가 사고를 대신하는 시대에, 철학자는 여전히 사진을 통해 무엇을 질문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철학자란 전통적으로 텍스트를 다루는 직업입니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라는 명제 이후, 현대 철학은 말로 할 수 있는 것, 곧 합리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는 텍스트에 강박적으로 집착했습니다. 그간 철학은 무엇이 논증될 수 있는가, 무엇이 개념으로 포획될 수 있는가에 골몰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전부일까요? 우리는 일상에서든 비일상에서든 말로는 끝까지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진실이라 느껴지는 어떤 사태를 계속 마주합니다. 저는 철학이 오히려 그 지점에서 질문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바로 그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는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진실, 논증 이전에 이미 우리를 설득하는 감각과 정서적 차원의 진실입니다. 사진은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위치에 있습니다. 통상 사진은 사실을 기록하는 매체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사진은 프레이밍과 선택, 맥락에 따라 언제든 허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모호하게 걸쳐 있다는 점에서, 사진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끊임없이 드러냅니다.
그래서 철학자가 사진을 통해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단순히 “이것은 사실인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 이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가?”,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감각은 왜 진실처럼 작동하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사진은 철학에 답을 주기보다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다시 질문하도록 만드는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리처드 로티, 하버마스, 네오프래그머티즘을 연구해 오셨습니다. 이 사유들은 오늘날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재구성하게 합니까.
앞서 언급했던 지점에 로티Richard Rorty와 네오프래그머티즘Neo-Pragmatism의 작업이 곧장 개입하고 있습니다. 로티는 합리와 비합리, 이성과 감성의 ‘경계 자체’를 문제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합리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합리성의 언어로 가득 찬 철학의 세계에서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다시 확보하려는 움직임입니다. 로티에게 있어 진리란 세계 어딘가에 이미 주어진 초월적 기준TRUTH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관행 속에서 성립하는 것truth입니다. 이는 진리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의 결과로 다시 위치시키자는 제안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 역시 도덕적 규범이나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제로 환원되기 어렵습니다. 책임이란 무엇을 주장하느냐보다, 어떤 대화를 가능하게 하느냐, 혹은 어떤 질문을 열어두느냐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로티 식으로 말하자면, 예술가는 사회를 정당화하거나 사회에 당위를 부여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getting better 자극하는 인물에 가깝습니다. 논증 대신 설득을, 증명 대신 공감을 끌어내는 방식입니다.
이 지점에서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와의 대비가 분명해집니다. 하버마스는 합리성의 기준을 지나치게 약화한다는 이유로 로티를 비판했고, 로티의 대척점에서 보편적인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강하게 옹호했습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합리성의 운명에 대해 거의 극단에 서 있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관심을 두는 지점은, 그 사이에서 무엇이 가능하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비합리를 배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회를 움직이는 판단, 감정, 연대는 합리적 논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네오프래그머티즘이 하려 했던 일은 바로 이 사실을 철학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었고, 예술은 그 작업을 또 다른 지점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예술은 합리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합리가 미처 포괄하지 못한 영역을 사회 안으로 다시 열어 보이는 실천입니다. 저는 예술이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정치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윤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봅니다.
박물관·미술관 진흥위원, 대학 교수, 연구자로서의 경험을 거쳐 이제 문화콘텐츠 ‘지원’의 현장에 합류하셨습니다. 제도 안에서 예술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칙적으로 예술의 자유는 무한해야 합니다. 이 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곧 예외와 조건이 덧붙기 시작하고, 결국 자유는 제도가 허락하는 범위에서만 작동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예술은 제도의 언어로 완전히 번역될 수 없는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이런 일은 금세 한계에 봉착합니다.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Tilted Arc〉 사태가 이 두 영역의 긴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공공장소에 설치된 세라의 작품은 지속된 민원으로 결국 철거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작품이 제도의 승인 아래 설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을 설치하자는 결정은 이미 예술가 개인의 판단을 넘어 제도적으로 합의한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발생하자,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예술가에게만 귀속되었습니다.
이것은 언뜻 예술의 자유를 인정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사후적으로 예술가에게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예술을 통제하는 구조입니다. 부당한 방식이지요. 제도가 동의했음에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예술가에게만 책임을 떠넘긴다면, 제도는 언제나 안전한 장소에서 관망하게 되는 반면 예술은 혼자서 위험을 떠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술이 누리는 자유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제도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지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도는 공적 자원의 사용에 대한 절차와 조건을 관리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로 창조된 작품을 사후적으로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예술의 자유란 곧 예술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을 자유, 사회를 불편하게 만들 자유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도 안에서 예술의 자유를 지키는 일은, 예술을 관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책임을 어떻게 나누고 감당할 것이냐는 문제가 되겠습니다. 제도가 예술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논란 역시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예술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사실상 예술을 길들이는 일만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의 연구는 일관되게 ‘합리성의 한계’를 다뤄왔습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이 한계를 드러내는 데 어떤 고유한 언어를 갖고 있나요.
제가 앞서 말씀드린 문제의식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합니다. 합리성은 세계를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바깥’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사진이야말로 합리성의 바깥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매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은, 관객에게 그 장면이 마치 사실인 양 보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사진은 설명이나 주장 없이 사실의 외연을 곧장 제시합니다. 이 점에서 사진은 합리성이 요구하는 증거의 형식과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관객은 본능적으로 사진의 내용을 실제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진은 절대로 순수한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현대 사진작가들이 장면을 허구적으로 구성한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간은 프레임으로, 시간은 특정한 순간으로 잘려 나갑니다. 맥락은 배제되거나 새롭게 부여됩니다. 그러므로 사진은 사실의 특성을 강하게 지닌 허구적 매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모순적인 성격이 사진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사실과 허구의 중간 어딘가에 자리하면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때로 사실 이상의 진실을 전달합니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사건 전체가 아니라 그 사건이 남긴 흔적이나 잔상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정확한 원인과 맥락을 알지 못하더라도 사진의 장면이 지닌 분위기나 감정을 강하게 느끼곤 합니다. 이때 전달되는 것은 정보라기보다는 경험에 가까운 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사진은 합리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고유한 언어를 갖습니다. 합리성은 세계를 설명하려 하고, 설명은 언제나 완결을 지향합니다. 이와 달리 사진은 설명을 거부하고서 끝내 확정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합니다. 사진은 이해와 오해, 사실과 해석 사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관객이 어쩔 수 없이 사유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사진의 언어를, 무엇을 말해주는 언어라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사실로 믿게 되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드러내는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합리성을 폭로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합리성이 미처 닫아버리지 못한 질문을 열린 채로 남겨두며, 우리로 하여금 설명 이전의 진실, 혹은 설명 이후에도 남는 진실 앞에 서게 만듭니다. 바로 그 점에서 사진은 합리성의 한계를 가장 조용하면서도 집요하게 드러내는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와 《야옹이랑 사는 건 너무 슬퍼》는 학술 연구와는 결이 다릅니다. 학문과 일상의 글쓰기를 오가며 얻은 가장 중요한 통찰은 무엇입니까.
두 책은 학문의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으로 넘어오며 처음으로 시도했던 글입니다. 《야옹이랑 사는 건 너무 슬퍼》는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썼던 연작 수필집이고, 《스크리브너 무작정 따라하기》는 IT 매뉴얼로 일종의 대중 교양서지요. 이건 제가 밖에서 안으로 왔던 첫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저는 생각보다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연하지만 저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기대하는 미덕대로 훈련받아 왔고, 이것이 일상의 글쓰기에서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한 번 이쪽으로 건너온 뒤에는 다시 완전히 돌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학문적 글쓰기 자체를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한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5년이니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그처럼 일상의 언어를 통과하고 나니, 학문적 문장도 이전처럼만은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다시 학문의 영역으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올 때”도 어려움이 있었으니 “돌아갈 때”가 쉬울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 어려움이 나쁜 신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런 어려움이 제가 양 세계 사이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현재 제게 주어진 과제는 돌아가되 완전히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 될 겁니다. 학문적 엄밀함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의 감각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요.
두 영역을 오간 경험에서 얻은 통찰은 일종의 균형입니다. 학문과 일상의 균형이고,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합리와 비합리의 균형과도 비견됩니다. 학문은 세상을 엄밀하게 이해하려고 하지만 일상은 불완전하지요. 두 영역은 반드시 배척되는 것이 아니며 저 역시 양자가 함께 뒤섞이는 경계 지점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제가 얻은 통찰입니다. 진실 중에는 모호한 외연 가운데 더욱 선명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국가지원금을 통해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월간사진의 기획과 빅딜을 거쳐 사진전문갤러리 김영섭사진화랑과 같은 전문 공간으로 연결하는 과정은 예술과 제도, 시장이 만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조 속에서 선생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판단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술가가 시장을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예술은 지속되어야 하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한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든 소비되어야 다음 작업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시장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문제는 제가 타고난 예술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장에 가까워져야 한다는 당위만으로 폐기할 수 있는 전제가 아닙니다. 시장을 이해하려 들면 들수록, 오히려 제 감각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도 더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시장에 가까워지려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제도와는 척지지 않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가는 시장을 무시할 수 없고, 제도를 적으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예술가는 시장과 제도의 정중앙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예술가의 감각이 훼손된다면, 이 구조는 반드시 파괴됩니다. 저는 시장에 더 다가가려 애쓰면서 제도와도 불필요한 적대 관계를 만들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이 타고난 예술인으로서 지금 제가 감당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포스트휴먼, AI 이미지, 생성형 사진이 급격히 확산되는 지금, 철학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사진의 윤리’는 어떤 지점에서 다시 논의되어야 할까요.
이건 늘 반복되던 현상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과장된 소문이며 별 근거 없는 공포가 늘 동반합니다. 19세기 산업혁명기, 열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런 식의 소문이 퍼지곤 했습니다. 열차란 지나치게 속력이 빠르기 때문에 타고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져 버린다는 식의 소문이었지요. 당시 열차의 평균 속력을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이건 기술 그 자체보다도 이전까지의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린다는 공포에서 비롯합니다. 당시의 소문도 결국은 일자리를 잃게 된 마부들을 중심으로 퍼졌습니다. 도미에Honoré Daumier의 판화에 당시의 이런 과장된 공포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기술 앞에서 과한 공황에 빠지는 사회 세태가 보이지요.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광경입니다.
사진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사진은 영혼을 훔친다는 소문이 돌았고, 회화의 죽음을 선언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사진이 진실을 조작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이미 그때부터 제기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문제는 사진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진을 사용하는 맥락에서 비롯했습니다. 길지 않은 역사에서, 사진은 증명과 기록의 도구가 되는가 하면 선전과 왜곡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AI 이미지와 생성형 사진을 둘러싼 작금의 논의가 감정적 공포나 불합리한 상찬으로만 반목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셈이 되겠지요. 기억해야 할 점은, 윤리가 적용되는 지점은 기술의 바깥이라는 겁니다. 윤리란 기술 허용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사용에 따른 책임의 문제입니다. 열차든 사진이든 AI 이미지든 모두 인간의 선택과 제도 속에서 움직입니다.
지역 문화 행정과 중앙 학술 연구를 모두 경험하셨습니다. 한국 사진계가 제도적으로 가장 취약한 지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한국 사진계에 취약점이 있다면, 그건 개별 작가의 역량이 아니라 구조에 있을 겁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교육, 지원, 전시, 시장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된 채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건 사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예술계 전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사진에서는 유독 그 문제가 두드러집니다.
신진 작가가 공모나 지원 사업으로 한두 번의 전시 기회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전시 이후의 비평, 다음 작업을 유도하는 지원, 시장과의 접점, 이런 과정이 체계적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다 보니 작가는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작업의 축적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기본적으로 제도가 예술을 프로젝트 단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 하나, 전시 하나, 성과 하나에 집중하다 보니 작가의 긴 작업 궤적이나 언어 형성 과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특히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건 우려스러운 상황입니다. 제도의 요구에 따라 작업하다 보면 결국 작업 밀도는 낮아지게 됩니다.
여기서 제도가 해야 할 역할은 기준 강화나 성과 관리가 아닙니다. 작가가 다음을 상상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일이겠지요. 지역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지요. 김영섭 사진화랑도 그런 역할을 일부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이 중앙의 담론이나 시장과 연결되는 통로는 여전히 협소합니다.
사진은 기록과 예술, 증언과 허구 사이를 오가는 매체입니다. 이 모호성은 우리 사회의 진실 개념을 더 풍부하게 합니까, 아니면 흐리게 합니까.
사진의 모호성은 진실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리기보다 진실이 무엇으로 성립하는지를 다시 묻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로티에 따르면 우리가 믿는 진실이란 모두 언어게임의 산물입니다. 고정불변하고 유일무이하며 전지전능 편재하는 대상이 아니지요. 시공간과 사태의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적 영역에서는 인간의 언어와 역사 바깥에 존재하는 대문자 진리TRUTH란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에서나 그런 진리가 가능할 것이고, 종교란 어디까지나 사적 영역에 해당하지요.
사진이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진을 대문자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오해해 왔습니다. 사진이니 사실이라든가 카메라가 찍었으니 객관적이라는 믿음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사진은 대문자 진리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사진이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자리한다는 말은, 사진이 대문자 진리가 아니라 소문자 진리truth의 언어로 작동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사진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지요.
사진은 진실TRUTH을 제시하는 대신, 우리가 진실truth이라 부르는 것이 어떤 조건에서 성립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떤 장면을 ‘증거’로 받아들이고, 어떤 장면을 ‘연출’로 의심합니다. 똑같은 이미지도 어떤 맥락에서는 ‘기록’이 되고 다른 맥락에서는 ‘선전’이 됩니다. 사진은 그런 조건을 노출해서 진실 개념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사진의 모호성은 진실을 흐리는 도구라기보다, 오히려 진실이 작동하는 방식을 더 정교하게 보이게 하는 장치입니다. 사진은 관객에게 특정 내용이 진실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은 왜 이것을 진실이라 믿는지, 그 믿음은 어떤 언어와 제도, 경험의 층위 위에서 가능해지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실 개념을 더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의 위기는 진실이 사라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합의truth를 절대진리TRUTH로 다루려는 욕망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진은 그 욕망을 조용히 드러내고, 진실을 다시 조건의 문제로 되돌려 놓는 데 특히 유용한 매체입니다.
사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사진가들의 사진 평론이나 사진에 관한 책을 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지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쁘게 해보고 싶습니다. 월간사진에서 지면을 마련해 주신다면 성심껏 써보겠습니다. 한두 편의 글이 아니라 연재로, 더 나아가 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요. 책을 내고 싶다는 제 의지보다는 그걸 만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월간사진이 그 조건을 조금 열어주신다면 기꺼이 그 책임을 가지고 참여하겠습니다.
이 시대의 사진은 어떤 이유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오늘날 사진은 가장 빠르게 답을 주는 매체이면서도 가장 멀리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매체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보자마자 이해했다고 느끼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이해가 얼마나 불완전했는지 곧바로 드러납니다. 사진은 늘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감각을 남깁니다.
텍스트는 세상을 설명하려 들고, 텍스트를 통한 설명은 결론을 향해 치닫습니다. 반면 사진은 설명을 유예합니다. 사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느끼면서도 이를 말로 풀어내는 데는 주저하게 됩니다. 저는 이 망설임이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우리 멱살을 잡아서 사유의 첫머리로 끌고 갑니다.
그래서 사진은 계속되어야 한다기보다, 계속할 수밖에 없는 매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진이 있어 우리는 급하게 진실을 단정 짓거나 합리성을 급하게 신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설명보다 느리고, 명확한 결론짓기보다는 불편한 보여주기를 택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느림과 불편함 덕택에 우리는 생각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