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진동하고 사진은 머문다

2026년 8월 2일 64225자 완독 39분 소요

《월간사진》 2026년 8월호에 비평이 실렸습니다.


사물은 진동하고 사진은 머문다– 구본창 기획 《진동하는 사물들》, 그리고 AI 이후 사진의 ‘바탕’


국제갤러리 K1의 안쪽 전시장, 구본창의 사진에 빈 상자 몇 개가 놓였다. 귀중한 무언가를 품을 법한 외양이다. 그러나 정작 내용물은 없다. 새틴 안감에 움푹히 남은 자국과 눌린 윤곽만이 사라진 물건의 과거를 짐작하게 할 뿐. 상자는 비어 있으되 온전히 비어 있지만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은 자신의 부재를 흔적으로 남기고, 사진은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는다.

구본창이 기획한 《진동하는 사물들Objects in Oscillation》(이하 《진동》)은 이렇듯 빈자리에서 시작한다. 2026년 6월 9일부터 7월 19일까지 국제갤러리 K1과 K2에서 열린 전시에는 구본창을 비롯해 구성연, 김경태, 김수강, 박찬우, 정정호, 정희승, 조성연, 조선희 등 아홉 명의 사진가가 참여했다. 전시는 정물사진을 중심으로, 사진가가 사물을 만나고 관찰하며 이미지로 전환하는 방식을 살핀다. 이들 작업은 과한 디지털 후보정이나 AI 기반 이미지 생성·수정에 의존하지 않고, 사진가의 감각과 시선, 카메라의 광학적 기술을 통해 만들어졌다(Ocula, “Objects in Oscillation,” 2026.06.09). 이것은 공식 자료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 전시를 아날로그 사진의 순수성 변론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전시장에는 온갖 방식으로 재구성된 작품이 들어차 있다. 검 프린트gum print 같은 고전적 인화술에서 시작해 수백 장의 사진을 초점 합성focus stacking으로 결합하거나 시점을 레이어링으로 중첩하는가 하면, 사물을 제작하고 조각처럼 연출하며 문서와 유품을 아카이브처럼 수집한다. 여기서 이미 사진은 현실을 손대지 않고 받아들이는 ‘중립적 창’이 아니다. 사진의 ‘순수함’이 촬영 전후의 비개입을 뜻한다면, 그런 개념은 애당초 이 전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상황이 그렇다면, 이 전시가 AI 이미지와의 대비를 통해 되찾으려는 사진만의 가치란 대체 무엇일까? 사진의 기술적 무가공성이나 ‘인간만이 소유한다’는 식의 신비로운 창조성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이 전시는 이미지가 생겨난 근원, 배경, 그리고 그 바탕1을 찾아 나선다. 사물과 함께 보낸 시간, 그것을 만지고 옮긴 신체, 촬영 장소와 역사, 재료를 다루는 반복적 노동, 무엇을 선택하고 제외할지 결정한 판단,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이미지에 어떻게 축적되는가를 묻는다.

1. 구본창의 시선

《진동》에서 구본창은 참여 작가이자 큐레이터다. 그의 〈Object〉와 〈Collections〉는 아홉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의 작품인 동시에, 전시의 다른 작품을 읽도록 유도하는 문법에 가깝다.

구본창은 정물사진가 중에서도 오랜 기간 고유한 작업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들을 골랐다. 그가 주목한 작가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작업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고 조용히 실천을 지속한 이들이다. 구본창은 다큐멘터리나 개념사진에 비해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정물사진가들의 작업을 가시화하고자 한다(The Korea Times, 2026.06.10).

구본창이 작가를 선정한 기준은 새로움이나 기술적 혁신보다 축적과 지속성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는 AI라는 신기술에 곧장 반응하려는 기획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작업을 AI 시대의 문제와 함께 다시 보도록 만드는 전시에 가깝다. 시장의 주목이나 이미지의 유행과는 무관하게 한 가지 문제를 오래도록 붙드는 작업 방식, 그리고 사소한 대상 앞에서도 관찰을 중단하지 않는 성실함이 여기서 재조명되는 덕목이다.

이러한 기준은 구본창 자신의 작업사와도 중첩된다. 구본창은 1988년 기획한 워커힐미술관의 《사진ㆍ새 視座》 전에서 ‘만드는 사진’을 제안한 바 있다. 사진의 역할을 기록과 재현으로만 보던 당시의 통념에 맞섰던 기획이다. 필름을 긁고 겹치며 인화지를 자르고 꿰매고 태우는 작업, 콜라주와 포토그램과 토닝처럼 사진의 표면과 물질에 직접 개입하는 실험. 이는 회화·조각·판화의 속성을 사진에 끌어들이면서 대한민국의 사진 예술이 ‘주관적 표현’ 시대로 이행하는 주된 계기를 마련했다(서울시립미술관, 2023).

이후 19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구본창의 사진은 일견 급격히 조용해진다. 이전의 강한 물리적 변형은 약해지고, 먼지, 비누, 낡은 벽, 백자, 빈 상자처럼 미약한 대상이 중심에 들어온다. 화면은 넓어지고 최소한minimal의 내용만이 남았으며, 상처와 얼룩flawed, 비대칭, 마모와 결손restrained으로 시간의 흔적을 내보인다(Talking Pictures, 2025.07.02). 구본창의 회고에 따른다면 이는 부친의 타계 이후 구본창의 관심이 옮겨간 흔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만드는 사진’이라는 초기 작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변화한 것은 어디까지나 사진을 만드는 행위의 ‘위치’다. 초기 작업에서 ‘만들기’가 인화지와 필름에 가해지는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조작이었다면, 후기 작업에서는 촬영에 앞선 선택과 수집, 사물의 배치, 빛의 조절, 거리의 결정, 기다림과 반복이 이미지를 구성한다. 사진 표면에 직접 가해진 제스처는 줄었지만 사진 이전의 행위는 오히려 더 치밀해졌다.

그러므로 《진동》은 구본창에게 일종의 큐레토리얼 자화상exhibition as self-portrait of the curator2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 작가들이 구본창의 양식을 반복하거나 그의 영향 아래 종속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구본창이 오랜 기간 중요하게 여겨온 지속성, 관찰, 흔적, 소멸이라는 기준으로 여러 작가의 작업을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구본창 자신의 작업이 이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2. 정물에서 사물로

미술사 전반에서 정물은 그리 높은 지위가 아니었다. 정물이 이처럼 주변적인 장르로 평가된 데는 여성과 가정생활, 일상적 노동을 낮게 평가해온 사회적 위계와도 관련이 있다(Bryson, 1990). 역사화나 종교화가 인간의 위업과 공동체의 거대한 서사를 다루어온 반면, 정물은 일상의 도구를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구본창이 “조용히 작업해온 정물사진가"를 전면에 내세운 행위는 단순한 장르 소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진동》은 중요하지 않다고 분류되어 온 사물과 작업을 다시 중요하게 보는 전시다. 정물은 사소한 것을 찍는 장르가 아니라, 무엇을 사소한 것으로 간주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장르가 된다.

그러나 이 전시의 대상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안정된’ 정물에 머물지 않는다. 내용물이 사라진 상자, 도심 주변부의 콘크리트와 전선, 기능을 다한 병과 종이봉투, 썩어가는 과일, 설탕으로 만든 보석, 전쟁의 파편과 가족 문서, 이러한 사물은 더 이상 일상적으로 안정된 대상이 아니다.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고 분류할 수 있을 때에야 대상object일 뿐, 기능이 중단되고 관계가 어긋나면 낯선 사물thing일 따름이다. 고장이 난 창문, 멈춘 드릴, 쓰임을 잃은 물건이 갑자기 자신의 물질적 존재를 드러내는 것처럼, 사물은 인간의 목적에 순조롭게 복무하지 않을 때 비로소 두드러진다(Brown, 2001).

구본창의 상자는 보관이라는 기능을 잃었고, 구성연의 설탕 보석은 장식품의 영속성과 경제적 가치를 흉내 내면서도 습기와 시간 앞에서 무너진다. 조성연이 모은 콘크리트와 철근은 건축자재나 폐기물이라는 분류에서 빠져나와 불안정한 조형적 결합을 이룬다. 박찬우의 사물은 시장가격이 아니라 개인의 기억과 사용의 시간에 따라 다시 위계화된다. 이들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기존의 가치와 기능이 멈춘 자리에서 새롭게 말을 거는 ‘것들’이다.

전시 제목인 ‘진동’은 구태여 사물에 신비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의인화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행위란 인간과 비인간, 재료와 환경이 결합한 임시적 배치에서도 발생한다(Bennett, 2010). 설탕의 용해성, 과일의 부패, 금속의 녹, 종이와 안료의 반응은 작가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작품에 참여한다. 사물이 ‘진동한다’는 말은 물질이 인간처럼 욕망하고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재료의 시간과 변화가 이미지 형성에 개입한다는 뜻이 된다.

피사체만이 이 전시에서 사물로 남는 것도 아니다. 사진은 이미지인 동시에 크기와 표면, 종이, 안료, 액자, 사용과 이동의 역사를 가진 물질적 대상이다(Edwards & Hart, 2004). 사진의 의미는 화면에 재현된 내용만으로 결정되지만은 않는다. 검 프린트의 입자, 대형 프린트의 압도감, 여러 장의 중첩, 심지어는 전시장 벽에서 작품 사이에 남겨진 간격 역시 사진이 작동하는 방식의 일부가 된다.3

따라서 이 전시의 정물은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기록하는 장르가 아니다. 여기서의 사물은 기능을 얻고 잃으며, 사용되고 버려지고, 기억되고 다시 분류되는 시간을 가시화한다. 전시에서 진동하는 것은 사물의 표면만이 아니라 존재와 부재, 기록과 연출, 우연과 구조, 가치와 폐기, 이미지와 물질 사이의 경계다.

3. 사후의 시간: 구본창, 정정호, 조선희

이 전시의 작업은 공통된 ‘정물’ 개념에 강제로 편입하기보다 사물에 새겨진 시간의 유형에 따라 읽는 편이 그 차이를 더 잘 드러낸다. 구성연의 설탕은 가치의 재구성인 동시에 소멸이며, 정희승의 병렬투영은 관찰이라기보다 인식의 구조에 가깝다.4

첫 번째 시간은 무언가가 끝난 뒤에 시작되는 사후의 시간이다. 구본창의 빈 상자, 정정호가 추적한 가족사의 파편, 조선희의 마른 꽃과 썩은 과일은 삶과 기능이 종료된 뒤에도 물질이 지속되는 상태를 다룬다.

구본창의 〈Object〉는 상자 안에 있었던 물건을 복원하지 않는다. 사진은 사라진 물건이 무엇이었는지를 속시원히 알려주지 않으며, 그 부재를 구태여 서사로 완성하지도 않는다. 그저 안감에 남은 눌린 흔적과 빈 공간을 보여줄 따름이다. 구본창의 설명에 따를 때, 이는 “있었던 것과 사라진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연합뉴스, 2026.06.09). 이때 상자는 보이지 않는 내용을 대신 설명하는 기호라기보다,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진 자리다. 흔적이 곧 역사가 된다는 구본창의 언급이 이러한 작업의 핵심을 압축한다(아이뉴스24, 2025).

흔적은 과거를 완전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가 온전히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표시한다. 흔적이 강력한 까닭은 그것이 사건의 모든 내용을 알려주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가 실제로 여기를 통과했다는 불완전한 접촉을 남기기 때문이다(Iversen, 2017). 이러한 관점에서 구본창의 상자는 ‘보석’의 초상이 아니라 보석이 ‘사라진 사건’의 잔여물이다. 사진은 상자를 통해 부재한 내용을 대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부재가 물질에 가한 변형을 보여준다. 상자의 안감은 일종의 음화처럼 작동한다. 사물의 ‘몸’은 사라졌지만 압력과 접촉이 남긴 음각이 그 존재를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사진은 그 음각을 빛으로 옮기면서 흔적 위에 또 하나의 흔적을 겹친다.

구본창이 수집한 오래된 물건의 흠집과 얼룩은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시간이 물질에 기록된 방식이다. 동시에 이는 타인과 교감하는 행위로 확장한다. 사물의 흔적은 작가의 사적인 수집을 넘어, 관객이 자신의 상실과 기억을 투사할 수 있는 관계의 공간이 된다.5

정정호의 작업에서 사후성은 개인적 기억을 넘어 역사적 공백까지 이동한다. 전쟁기에 노무자로 동원된 노부老夫의 삶을 추적한 정정호는 접근할 수 없는 장소와 파편화된 기록을 마주한다. 작가는 탄피, 전선, 밧줄, 문서와 군사사진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배열해 잃어버린 한 개인의 역사를 사진으로 재구성한다. 조사, 수집, 배열의 긴 과정이 온전히 사진 안에 증거로 남는다(Ocula, 2026.06.09).

여기서 사진은 역사적 증거 그 이상이다. 정정호가 촬영한 것은 과거의 사건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작가가 과거에 접근하기 위해 구성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탄피와 밧줄, 문서는 모두 실제 역사적 자료일 수 있으나, 이들이 한 화면 안에서 관계 맺는 방식은 분명 현재의 조형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사진은 증언인 동시에 연출이며, 조사의 결과인 동시에 상상적 보충이다.

이 양면성은 작업의 약점이라기보다 중요한 윤리적 긴장이다. 지워진 역사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저 침묵만 하지 않은 채 사물을 배열해 보는 것. 정정호의 작업은 역사적 공백을 사실로 위장된 허구로 메우기보다, 현재의 시선으로 공백에 접근하는 과정을 보여줄 때 설득력을 얻는다.6

조선희의 〈Black Imago〉와 〈Planet〉에서 사후의 시간은 생물학적 변화로 나타난다. 〈Black Imago〉는 시든 꽃에 화장한 재를 연상시키는 검은 안료를 입히고, 〈Planet〉은 썩으면서 형태를 잃는 과일을 검은 배경 앞에서 촬영한다. 과일은 작은 행성처럼 보이고, 생명의 기능이 종료된 물질은 또 다른 조형적 상태로 이동한다. 사물을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주체로 보는 작가의 시선이(Ocula, 2026.06.09) 이러한 작업에 더욱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 작업에서 사진은 부패를 정지시키는 역설적 역할을 한다. 과일은 촬영 전후에도 계속 썩지만, 사진은 붕괴의 한 단계를 완결된 형태로 고정한다. 검은 배경과 정교한 조명은 사물을 우주의 천체나 초상사진의 인물처럼 고립시킨다. 일상적으로는 버려질 부패물이 장엄한 이미지로 변환된다.7

구본창, 정정호, 조선희의 차이가 전시의 ‘진동’을 만들어낸다. 구본창은 사라진 대상의 자리를 비워둔다. 정정호는 공백을 조사와 배열로 접근하되 완전히 채울 수 없는 역사와 대면한다. 조선희는 소멸 과정의 물질을 강한 조형적 초상으로 전환한다. 세 작가 모두 죽음 이후를 다루지만, 부재를 유지하는 방식, 공백을 재구성하는 방식, 변형된 물질에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이 차이를 간과한 채로 이 세 작업을 ‘삶과 죽음의 성찰’로만 묶는다면 전시의 진동은 정지하고 만다.

4. 관찰의 시간: 김수강, 김경태, 정희승

두 번째 시간은 대상을 오래 바라보고 관찰의 조건을 설계하는 시간이다. 김수강, 김경태, 정희승은 작업 기술도 화면을 만들어내는 방식도 다르지만, 눈앞의 사물을 즉각 포착하는 대신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지 진득하게 조직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김수강은 돌, 유리병, 종이봉투와 같이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촬영한다. 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피사체의 희귀성보다 검 프린트의 제작 과정이다. 종이에 안료가 섞인 감광액을 바르고 노광한 뒤 물로 현상하는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밀도와 색조를 쌓는다. 그 결과 사진은 매끈한 정보 전달의 표면이 아니라, 안료와 종이가 만드는 회화적이고 촉각적인 물성을 획득한다(Ocula, 2026.06.09).

김수강의 사진을 ‘수작업이므로 인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보다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관찰의 시간을 연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작가는 완성될 이미지를 예측하기 어렵다. 안료의 농도, 종이의 흡수, 빛의 세기와 물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계속 판단해야 한다. 노광과 현상을 거듭하는 제작 과정은 미리 정해진 형태를 복제하는 노동이 아니라, 재료의 반응과 협상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작업에서 사진은 이미지인 동시에 사물이 된다(Edwards & Hart, 2004). 검 프린트는 사물을 재현한 이미지이지만, 감광액과 안료가 반복적으로 쌓인 그 자체 사물이기도 하다. 관객은 사물의 형태와 함께 사진 표면의 밀도와 결까지 보게 된다. 사물의 조용한 존재감은 촬영된 대상과 더불어 이를 담는 프린트가 스스로 획득한 무게에서 발생한다. 여기서 사진의 ‘바탕’은 화면 밖의 이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표면 그 자체에 새겨지는 것이다.

김경태의 초점 합성은 언뜻 보기에 이와는 정반대의 기술처럼 생각된다. 김경태는 황동 육각너트 같은 작은 대상을 여러 초점으로 반복 촬영한 뒤, 이렇게 얻은 수백 장의 이미지를 합성해 화면 전체에 초점이 분포된 극히 선명한 사진을 만든다. 너트 표면의 미세한 상처와 가공 흔적은 육안보다 더 정밀하게 드러난다(The Korea Times, 2026.06.10). 단일 렌즈와 한 번의 노출로는 얻을 수 없는 깊이와 세부가 계산적 결합을 통해 나타난다.

김경태의 작업은 전시가 내세우는 ‘카메라의 광학 기술’이라는 설명을 아주 생산적으로 뒤흔든다. 초점 합성은 광학적 촬영에 기반하지만, 최종 이미지는 복수의 사진을 디지털로 결합한 결과물이다. 카메라 앞에 존재했던 장면과는 어느 한순간과도 동일하지 않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의 시각과 단일 렌즈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전면적이고 전격적인 선명성을 구성한 계산 이미지다.

이 작업이 생성형 AI 이미지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차이는 합성 여부가 아니라 합성이 수행하는 기능에 있다. 김경태의 디지털 처리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임의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물의 표면을 더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이미지의 원천은 ‘실재’하는 하나의 너트와 ‘실제’ 광학적 접촉에 묶여 있으며, 계산은 대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맺는 시각적 관계를 ‘확장’한다.

이는 《진동》이 디지털 기술을 거부하는 전시가 아님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전시는 기술적 순수성이 아니라 기술을 어떠한 목적과 태도로 사용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 수공적 검 프린트와 계산적 초점 합성은 기술적으로 정반대이지만, 대상을 더 오래 보고 표면의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정확히 일치한다. 수작업과 디지털 합성은 단순히 속도로 구별되지 않는다.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찰의 밀도를 높인다.

정희승의 〈Parallel Projection〉은 관찰의 문제를 시각적 기술에서 인식론적 구조로 이동시킨다. 이 연작은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주사위 던지기』를 사진으로 번역해내며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다룬다. 정희승은 이미지와 원문의 개념을 한 소실점에서 만나게 하지 않고, 서로 나란히 진행하되 교차하지 않는 병렬적 관계로 배치한다. 이를 위해 소실점이 없는 아이소메트릭 그리드와 병렬투영의 시각체계를 활용한다(Ocula, 2026.06.09).

전통적인 원근법은 화면 속 대상을 하나의 시점과 소실점에 종속시킨다. 반면 병렬투영에서는 거리에 따른 축소가 일어나지 않으며, 관찰자의 위치가 절대적 중심이 되지 않는다. 정희승의 사진은 사물을 정확히 묘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진이 우연한 세계를 어떻게 구조화된 이미지로 바꾸는지 묻는다. 카메라 앞에서 우연히 발견된 장면도 촬영되고 선택되는 순간 필연적인 작품처럼 보이게 된다. 이 점에서 정희승의 작업은 ‘관찰’이라는 표제가 온전히 담지 못하는 인식론적 긴장을 품는다.8

김수강에게 기술은 손과 재료의 반복이고, 김경태에게 기술은 인간 시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계산이며, 정희승에게 기술은 세계를 배치하는 시점의 구조다. 이들을 연결하는 것은 특정 장비나 제작기법이 아니라, 사진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다. 사진가는 대상을 보는 동시에 보는 방법을 설계한다.

기술의 개입 자체를 인간성과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면 사진의 역사도 설명할 수 없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인간의 눈과 다른 방식으로 빛을 기록했으며, 렌즈와 감광재료, 암실과 소프트웨어는 보이는 세계를 끊임없이 변형해왔다. 문제는 기계가 개입하는지가 아니라, 기술적 매개가 사물과 작가의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그 관계를 대체하고 은폐하는지에 있다.

5. 가치가 구성되는 시간: 조성연, 박찬우, 구성연

세 번째 시간은 사물의 의미와 가치를 재배열하는 시간이다. 조성연, 박찬우, 구성연의 사진은 대상을 그대로 발견해 촬영하기보다 수집하고 제작하며 화면 내의 관계를 조직한다. 이들의 작업은 현실의 수동적 기록이라는 정물사진의 통념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조성연은 도시 변두리에서 주운 콘크리트 파편, 철근, 전선, 기계 부품과 식물 잔해를 결합한다. 도시의 정상적인 순환에서 떨어져 나온 잔여물이다. 이러한 장면은 사전에 완전히 계산된 연출이라기보다 작가가 사물과 공유한 시간과 친화성에서 발생한 일시적 평형에 가깝다(Ocula, 2026.06.09). 건축자재로서의 목적을 잃고 폐기물로 분류된 것들이 작가의 수집과 조립을 거쳐 불안정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그 관계가 완전히 자의적이지만은 않다. 파편의 무게와 균형, 재질과 마모, 식물과 금속의 차이가 배열의 범위를 제한한다.

조성연의 작업에서는 ‘발견’과 ‘연출’이 대립어로 서지 않는다. 작가는 도시의 잔해에서 가능성을 발견하지만, 그 가능성은 수집하고 옮기고 결합하는 행위 없이 사진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조성연의 사물은 폐기된 상태 그대로의 다큐멘터리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에 편입된 조형적 구성물이다. 작품의 형태는 작가의 머릿속 계획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Bennett, 2010). 콘크리트의 질량, 전선의 탄성, 철근의 길이, 식물의 건조 상태가 결합의 결과에 참여한다. 사진은 작가가 사물에 명령한 형식을 기록하기보다, 인간의 선택과 비인간 재료의 힘이 잠시 함께 만든 배치를 고정한다.

박찬우는 조선시대 책거리의 진열 형식을 현대적으로 변주한다. 전통적인 책거리가 책과 문방구, 도자기와 진귀한 물건을 배치해 학식과 소유, 사회적 위신을 표현했다면, 박찬우의 화면에는 경제적 가격보다 개인적 기억과 사용의 시간이 축적된 일상 물건들이 놓인다. 복수 시점을 중첩한 구성은 사물을 단일한 위계나 한 사람의 고정된 시점에 종속시키지 않는다(Ocula, 2026.06.09).

박찬우의 작업에서 정물은 가치체계를 전시하는 장치다. 한 물건이 화면의 중심에 놓이고 다른 물건보다 크게 보이는 현상은 시장가격이 아니라 기억의 비중에 따라 결정된다. 이때 사진은 이미 존재하는 가치를 반영하지 않는다. 무엇을 수집하고 함께 놓을지 선택하면서 가치의 질서를 새로 만든다.

브라이슨(Bryson, 1990)이 정물화에서 주목한 물질문화의 위계가 이 작업에서 한국적인 역사형식과 만난다. 책거리는 애초부터 사물의 집합을 통해 욕망과 정체성을 조직했던 장치다. 박찬우는 그 장치를 차용하면서도 권위와 희소성의 표지를 개인의 경험으로 교체한다. 다만 사적인 기억이 언제나 시장가치보다 더 진실하거나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기억 역시 선택과 망각을 통해 위계를 만든다. 중요한 것은 그가 기존 가치체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치체계가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구성연은 설탕으로 보석과 장식품을 정교하게 제작하고 정물로 배치한 뒤 촬영한다. 완성된 이미지에서 설탕 조각은 실제 보석처럼 반짝이지만, 재료의 성질을 아는 순간 장식품의 견고함은 환영이 된다. 설탕은 달콤하고 매혹적이지만 습기와 열 앞에서 허무할 정도로 취약하며, 영속적 가치를 상징하는 보석의 형태와 쉽게 사라지는 물질의 성격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긴장이 생겨난다(Ocula, 2026.06.09).

구성연의 작업은 실재와 모방의 관계를 두 겹으로 만든다. 설탕이 보석을 모방하고, 사진은 설탕으로 만든 가짜 보석을 실제 장식품처럼 보이게 한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보석도 설탕 조각도 아닌 사진의 표면이다. 카메라는 허구를 폭로하기보다 한동안 유지한다. 촬영된 설탕은 실제 설탕보다 더 오랫동안 반짝이며, 소멸하는 물질은 사진 속에서 영속성을 획득한다.

이 작품은 AI 이미지와의 비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화면만으로는 실제 보석과 설탕 조각, 디지털로 생성한 장식품을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의미는 이미지의 외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설탕을 녹이고 빚어 형태를 만든 과정, 그것이 무너지기 전 촬영해야 했던 시간, 물질의 취약성과 이미지의 지속성 사이의 역설이 작품을 구성한다. 동일하게 보이는 이미지를 AI가 생성할 수 있더라도, 그 이미지가 구성연의 작업과 같은 의미를 자동적으로 갖는 것은 아니다.9

조성연, 박찬우, 구성연의 작업은 ‘손대지 않은’ 사진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사물을 직접 제작하고, 수집하고, 옮기고, 배열하며, 복수의 시점과 조명을 설계한다. 이 작품들은 현실의 사물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뒤 그 개입의 결과를 사진으로 만든다. 생성형 AI와의 차이를 ‘조작된 이미지 대 조작되지 않은 사진’에서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작업에서 사진의 ‘바탕’은 가공의 ‘부재’가 아니라 가공의 ‘구체성’에 있다. 무엇을 어떤 재료로 만들었고, 어디에서 수집했으며, 어떠한 시간과 물리적 제약 속에서 배열했는지가 이미지의 의미를 결정한다. 현실은 손대지 않은 원재료가 아니라, 작가와 사물이 서로를 바꾸는 과정이다.

6. AI 이후의 사진: 생성, 판단, 책임

《진동》을 둘러싼 주요 보도는 AI 시대에 사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전면에 놓는다. 《진동》은 관찰, 빛, 형식, 물질적 현실이라는 사진의 기본 형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도로 읽히는가 하면, AI가 매끈한 이미지를 빠르게 생성하는 시대에 ‘인내하는 시선’과 광학적 렌즈의 힘을 보여주는 전시로 소개되기도 한다(The Korea Times, 2026.06.10).

여기서 우리는 구본창 자신의 진술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구본창은 사진가가 된다는 것은 예쁜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물과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며, AI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어도 사진가의 눈을 만들 수 없다고 보는 한편(The Korea Times, 2026.06.10), AI로 만든 이미지와 사진작품을 눈으로 구분하기는 어려움에도 사진에는 일회성 이미지에 없는 시간과 사유가 축적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사진이 점차 공예와 유사한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함께 내비친다(연합뉴스, 2026.06.09).

실제로 김수강의 반복 인화, 정정호의 조사와 수집, 조성연의 채집과 배열, 구성연의 오브제 제작은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전의 긴 시간을 포함한다. 물론 “AI는 일회적이고 사진은 숙고적"이라는 대립을 보편 명제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AI를 사용하는 작업도 장기간의 기획, 반복적 수정과 선택, 데이터 구축과 물질적 설치를 포함할 수 있으며, 전통 사진 역시 자동화된 촬영과 대량 생산, 즉각적 소비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AI가 창의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없다는 주장 역시 쉽사리 방어되지 않는다. AI에게 창조보다 평가가 더 어렵다는 마거릿 보든(Boden, 1998)의 논의는 이미 평가가 끝난 이야기다.10 다만 보든의 구분법은 구본창이 강조하는 사진가의 ‘눈’을 보다 정확하게 재해석하게 한다. 생성이 아니라 선택과 평가가 어렵다는 사실은 사진가의 작업에서도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가 가장 판단집약적인 국면임을 시사한다. AI가 새로운 이미지를 산출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결과를 특정한 생애·역사·작업의 맥락 안에서 평가하고 책임지는 일은 분명히 구별된다.

다만 이 구별 역시 인간과 AI 사이의 영구적인 본질적 경계로 고정해서는 안 된다. 예술 창작에서 인간과 기계의 역할을 선명하게 분리하기 어렵다는 코켈베르흐(Coeckelbergh, 2017)의 지적이나, AI가 인간처럼 감정을 경험하거나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관객에게 의미 있고 정서적인 작품을 산출할 수 있다는 채터지(Chatterjee, 2022)의 주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AI 이미지에 인간적 체험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의 미적 효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11

AI라는 대립항이 전시의 작품평가를 미리 조직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현시점에서는 눈으로 구별하기 어려운 이미지라 해도 ‘AI가 만들었다’는 표식이 인지되는 순간 “인간이 제작한” 이미지보다 열등하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기술, 노동, 금전적 가치에 대한 평가 차이가 크며, 인간 작품을 AI 작품과 비교해 제시할 경우 인간의 창의성이 더 높게 평가되는 경향도 우세하다(Horton, White & Iyengar, 2023).

이러한 연구에 비추어 볼 때, 국제갤러리가 전시를 AI 이미지와 대립시켜 설명하는 행위는 시대 배경 상 중립적인 방식이라 보기는 어렵다. 관객이 작품을 보기 전에 이미 인간의 노동, 지속적 관찰, 광학적 기술, 수공성과 진정성을 더 높게 평가하도록 만드는 프레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AI는 ‘출품’하지 않았지만, 인간 사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보이지 않는 비교대상으로 이미 전시장 안에 들어와 있다.

물론 이 프레임을 반드시 부당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AI 이미지의 확산이 사진의 제작과 수용 조건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현시점에 사진가의 노동과 판단을 다시 묻는 일은 분명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가 AI를 구체적인 기술이나 창작 실천이 아니라 ‘빠르고 매끄러우며 사유가 없는 이미지’로 일반화할 경우, AI는 실제 분석대상이라기보다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한 편리한 수사로 기능한다.

생성형 AI의 윤리적 문제는 대개 학습 데이터의 출처, 원작자의 동의, 노동과 보상, 문화적 편향, 결과에 대한 책임 등에서 발생한다. 생성예술의 편향 역시 최종 이미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설정, 데이터 선택, 미술사적 분류, 스타일 모델링, 알고리즘 설계와 결과 해석의 전 과정에서 형성된다(Srinivasan & Uchino, 2021). AI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 분류하고 이름 붙인 이미지 자료를 통해 세계를 본다. 아름다운 결과물이 비윤리적 데이터 수집과 노동관계 위에서 만들어질 수 있으므로(Jiang et al., 2023), “AI 이미지가 미적으로 성공했는가"라는 질문과 “AI 이미지를 가능하게 한 생산구조가 정당한가"라는 질문은 분리되어야 한다.

아홉 명의 정물사진가를 모은 전시에 학습 데이터의 정의正義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전시의 수사가 AI를 구체적 실천이 아니라 ‘빠르고 매끄러운 이미지’로 일반화하고 그 위에서 인간 사진의 가치를 손쉽게 대비시킬 때, ‘인간의 눈’, ‘장인정신’, ‘직접 관찰’은 사진의 가치를 설명하는 미학적 언어일 수는 있어도 AI 윤리의 기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 윤리를 논하려면 어떤 데이터가 사용되었고, 누가 동의했으며, 이익과 손해가 누구에게 배분되고, 발생한 피해를 누가 책임지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동》이 AI 담론에 제공할 수 있는 독자적인 기여는 이미지의 출처를 단순히 ‘인간 제작’이라고 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전시는 사물의 채집 장소, 재료의 성질, 개인과 가족의 역사, 반복적 인화와 촬영, 실패와 불완전성을 작품의 의미 안으로 끌어들인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발생한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사진의 ‘바탕’은 사진만이 독점하는 형이상학적 속성이 아니다. AI를 활용한 예술도 데이터의 역사, 협업자의 노동, 작가의 선택과 설치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강한 근거를 구축할 수 있다. 반대로 사진도 피사체와 제작조건을 지우고 출처 없는 표면으로 소비될 수 있다. 차이는 절대적인 매체 구분보다, 관계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가시화되고 그 관계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에 있다.

그러므로 구본창의 ‘사진가의 눈’은 인간적 순수성의 표지로 읽기보다 ‘책임지는 판단’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 생산적이다. 사진가의 눈은 기계가 없는 시선이 아니라, 기계를 사용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여줄지 결정하며 그 결과를 자신의 작업으로 감당하는 태도다. 다만 책임은 사진을 AI와 구별하는 기준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작품의 미적 가치를 정초하지는 않는다. 형편없는 작품에 대해서도 온전히 책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책임지는 판단’은 ‘왜 가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다른가’에 답하는 개념이다. 사진의 힘은 특정한 세계와의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그 증언의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다는 데 있다.

7. 개인의 작업사에서 집단적 사진론으로

《진동》을 구본창의 최근 작업사 안에서 보면, 그의 변화는 새로운 양식을 발명한 데서보다 자신의 작업을 둘러싼 맥락을 재편하는 데서 뚜렷해진다.

2023년 12월부터 2024년 3월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구본창의 항해》는 초기 습작과 실험사진, 대표 연작, 수집품과 아카이브를 포함해 약 1,100점 규모로 구본창의 긴 작업사를 구성했다. 전시는 그를 한국 현대사진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로 역사화하는 동시에, ‘호기심의 방’, ‘모험의 여정’, ‘하나의 세계’, ‘영혼의 사원’, ‘열린 방’이라는 서사 안에서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통사적으로 조직했다(서울시립미술관, 2023).

2024년부터 2025년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구본창: 사물의 초상》은 이 방대한 작업사에서 사물이라는 축을 추출했다. 역사적 유물과 백자, 금관, 비누, 빈 상자, 건축의 흔적, 개인 수집품과 아카이브가 거시적 역사와 사소한 일상의 서사로 재구성되었다. 전시는 구본창이 사물을 인물의 초상처럼 대하며, 시간에 따라 축적된 고유한 이야기를 드러낸다고 설명했다(Kukje Gallery, 2024).

2026년 국제갤러리 전시는 다시 한 단계 이동한다. 서울시립미술관이 구본창 개인의 생애와 한국 사진사를 연결했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그의 사물 연작을 집중적으로 재해석했다면, 《진동》은 개인의 사물관을 여러 사진가의 실천으로 확장한다. 이제 구본창은 자신이 찍은 사물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가들이 사물을 관찰하고 제작하고 기억하는 방식을 선택해 하나의 사진론으로 조직한다.12

《진동》은 이러한 수용을 작가의 큐레이션으로 전환한다. 이제 구본창의 작업은 새 연작의 출현으로만 측정할 수 없다. 이번 전시에 나온 〈Collections 18〉은 2019년 작품이고, 〈Object〉 역시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연작이다(Ocula, 2026.06.09). 새로운 것은 작품의 외형보다 위치다. 개인 회고전과 사물 중심의 기관전을 거친 작품들이 이제 다른 사진가의 작업을 연결하는 기준점이 된다.

구본창은 다큐멘터리와 개념사진에 비해 덜 조명받아온 정물사진의 실천을 전면에 내세우고, 검 프린트, 초점 합성, 아카이브, 조각적 연출, 문학적 구조를 같은 전시장 안에 놓는다. ‘정물사진’이라는 명칭 아래 서로 다른 기술과 태도를 병치함으로써, 한국 사진이 기록성과 회화성의 오래된 대립을 넘어 이미 다층적인 현대미술 실천으로 발전해 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떤 작가를 포함하고 누구를 제외할지, 무엇을 정물사진의 중심 문제로 볼지는 큐레이터의 판단이다. 특히 구본창이 자신을 출품 작가로 포함하고 그의 〈Object〉를 전시의 해석적 중심에 둔 것은 자기 역사화의 효과를 낳는다. 구본창은 정물사진의 다양한 실천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사물관을 그 실천들의 선행적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모든 큐레이션은 역사적 배열이며, 작가가 큐레이터일 때 자기 작업의 위치를 재규정하는 효과는 더욱 강해진다. 중요한 것은 참여 작가들의 차이가 구본창의 ‘조용함’, ‘흔적’, ‘소멸’이라는 언어로 모두 흡수되지 않도록 읽는 것이다. 김경태의 계산적 시선, 정희승의 문학적 구조, 박찬우의 가치체계, 정정호의 역사적 조사에는 구본창의 미학과 겹치지 않는 독자적인 문제가 있다.

같은 기간 국제갤러리 한옥 공간에서 열리는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형태의 시학》이 꽃과 인체, 조각을 고전주의적 형식으로 정제해 형태의 완성을 강조한다면, 《진동》은 형태가 발생하고 무너지는 과정—시간, 기억, 부패, 결손—을 전면에 놓는다. 두 전시는 사진이 현실을 복제하는 대신 대상에 새로운 형식적 존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그 형식을 대하는 태도에서 갈라진다(Ocula, “Robert Mapplethorpe: The Poetics of Form,” 2026.06.09).

8. 성취, 그리고 남은 문제

《진동》의 가장 큰 성취는 정물사진을 아름다운 사물의 배열이라는 협소한 장르에서 꺼내, 사물과 인간 사이의 시간·기억·역사·욕망을 다루는 형식으로 확장한 데 있다. 전시장에 놓인 것은 단순한 병, 꽃, 과일, 너트와 장식품이 아니다. 기능을 잃고도 남은 것, 폐기되었다가 다시 수집된 것, 기억에 의해 가치가 바뀐 것, 사라지기 전에 촬영된 것, 역사적 공백을 대신해 현재에 배열된 것들이다.

또한 전시는 사진의 매체성을 특정한 제작기법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수공적 검 프린트와 계산적 초점 합성, 카메라에 의한 직접 촬영과 적극적인 오브제 제작, 개인적 수집과 역사적 아카이브가 공존한다. 이 다양성은 사진의 정체성을 ‘어떻게 찍었는가’라는 기술적 분류보다, 대상과 어떠한 관계를 구축했는가라는 문제로 이동시킨다.

구본창이 작가들의 공통점으로 강조한 지속성도 설득력이 있다. 이 전시는 순간적으로 AI를 주제로 삼은 작품들을 모으지 않는다. 참여 작가들은 AI 이미지가 대중화되기 전부터 각자의 방식으로 사물의 표면, 시간, 소멸과 가치를 탐구해왔다. 전시는 기존 작업을 AI 시대의 질문 속에 재배치함으로써, 오래된 실천이 새로운 기술환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준다.

물론 구본창의 큐레토리얼 중심성이 참여 작가들의 차이를 얼마나 허용하는가라는 문제는 남는다. 전시를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 ‘조용한 존재’, ‘삶과 죽음의 성찰’로만 설명하면 모든 작업이 구본창의 후기 미학으로 수렴한다. 그러나 김경태의 기계적 정밀함에는 따뜻함보다 냉정한 분석이 있고, 정희승의 병렬투영에는 교감보다 구조적 긴장이 있으며, 정정호의 작업에는 조용한 관조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역사적 폭력이 있다. 전시의 진동은 이러한 불일치가 유지될 때 발생한다.

9. 진동하는 것은 관계다

다시 구본창의 빈 상자로 돌아가 보자. 사진 속 상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시간이 겹쳐진 장소다. 사물이 상자 안에 머물렀던 시간, 그것이 빠져나간 순간, 상자가 버려지거나 수집된 과정, 작가가 상자를 발견하고 촬영하기까지의 시간, 관객이 빈자리를 보며 존재하지 않는 내용을 상상하는 시간이 한 화면 안에 포개진다. 다만 이 시간의 상당 부분은 화면이 아니라 화면을 둘러싼 관계에 새겨져 있다.

생성형 AI는 이와 똑같아 보이는 빈 상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새틴의 광택과 음각, 희미한 빛, 구본창 사진의 절제된 색조까지 설득력 있게 모방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두 이미지의 차이가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어디에 놓이는지는 정확히 말해야 한다. 지각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이미지 앞에서, 구본창 상자의 차이는 대체로 이미지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다. 전시가 옹호하는 가치는 표면의 진위가 아니라 관계의 구체성에 있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 사진의 절대적 우월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이 의미 있고 윤리적이 되는 것은 아니며, AI를 활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이 피상적이거나 무책임해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지점은 이미지가 무엇으로부터 발생했으며, 그 발생조건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그 결과에 누가 책임지는가에 있다.

《진동》은 AI가 예술을 만들 수 없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더 현실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미지가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시대에, 사진가는 왜 하나의 사물을 선택하고 오래 바라보며, 그것을 옮기고 만들고 인화하고 배열하는가. 결과물만으로는 구별되지 않을 수 있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과정과 관계를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인가.

전시장에 놓인 사물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진동하는 것은 사물과 사진가 사이에 축적된 시간이고, 사진과 관객 사이에서 다시 발생하는 기억과 해석이다. 구본창의 큐레이션은 사진의 가치를 현실의 단순한 복제에서 찾기보다, 사라지는 것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흔적을 남기는 능력에서 찾는다.

사진이 AI 이미지와 다른 까닭은 반드시 더 진실하기 때문이 아니다. 《진동》이 보여주는 사진의 힘은 하나의 사물과 장소, 역사에 더 구체적으로 연루되고, 그 연루의 결과를 이미지로 선택하며, 그 선택에 책임지는 데 있다. 사진은 사물을 정지시키지만, 그 안에 얽힌 관계까지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사물은 침묵하고 사진은 머문다. 그 사이에서 시간은 계속 진동한다.

《월간사진》 2026년 8월호


참고문헌

(1) 단행본, 논문

Bennett, Jane.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ke University Press, 2010.

Boden, Margaret A. “Creativity and Artificial Intelligence.” Artificial Intelligence 103, nos. 1–2, 1998, pp. 347–356.

Brown, Bill. “Thing Theory.” Critical Inquiry 28, no. 1, 2001, pp. 1–22.

Bryson, Norman. Looking at the Overlooked: Four Essays on Still Life Painting.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Chatterjee, Anjan. “Art in an Age of Artificial Intelligence.” Frontiers in Psychology 13, 2022.

Coeckelbergh, Mark. “Can Machines Create Art?” Philosophy & Technology 30, 2017, pp. 285–303.

Edwards, Elizabeth, and Janice Hart, eds. Photographs Objects Histories: On the Materiality of Images. Routledge, 2004.

Foster, Alasdair. “Bohnchang Koo: Shades of Being.” Talking Pictures,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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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rsen, Margaret. Photography, Trace, and Traum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7.

Jiang, Harry H., et al. “AI Art and Its Impact on Artists.” Proceedings of the 2023 AAAI/ACM Conference on AI, Ethics, and Society, 2023.

Srinivasan, Ramya, and Kanji Uchino. “Biases in Generative Art: A Causal Look from the Lens of Art History.” Proceedings of the 2021 ACM Conference on Fairness, Accountability, and Transparency, 2021.

심소나·조예은·장보영·이보아. 「현대 사진 전시의 관람 경험에 대한 실증적 연구: ≪구본창의 항해≫ 사진전 사례연구 중심으로」. 『한국과학예술융합학회』 42권 5호, 2024, pp. 251–266.

(2) 언론 보도, 기관 자료

국제갤러리(Ocula). “Objects in Oscillation.” Ocula, 2026.06.09. https://ocula.com/art-galleries/kukje-gallery/exhibitions/objects-in-oscillation/

국제갤러리(Ocula). “Robert Mapplethorpe: The Poetics of Form.” Ocula, 2026.06.09. https://ocula.com/art-galleries/kukje-gallery/exhibitions/robert-mapplethorpe-the-poetics-of-form/

The Korea Times. “9 still life photographers claim new spotlight in AI era at Kukje Gallery.” 2026.06.10. https://www.koreatimes.co.kr/lifestyle/arts-theater/20260610/9-still-life-photographers-claim-new-spotlight-in-ai-era-at-kukje-gallery

연합뉴스. 「AI 이미지엔 없는 사물의 본질을 살피다…구본창 기획 사진전」. 2026.06.09. https://www.yna.co.kr/amp/view/AKR20260609156400005

아이뉴스24. 「삼성호암상 수상 구본창 작가 “흔적은 곧 역사, 창작은 타인과 교감”」. 2025. https://www.inews24.com/view/1856607

서울시립미술관(SeMA). 《구본창의 항해》 전시 개요. 2023.12–2024.03. https://sema.seoul.go.kr/en/whatson/exhibition/detail?exNo=1244533

Kukje Gallery. 《구본창: 사물의 초상》 관련 뉴스. 2024. https://www.kukjegallery.com/news/view?seq=957



  1. 이 글에서는 이미지가 발생한 물질적·시간적·역사적 관계의 총체를 가리켜 사진의 바탕ground이라 부를 것이다. ‘바탕’은 사진만이 독점하는 형이상학적 속성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지표index로서의 흔적,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 엘리자베스 에드워즈와 재니스 하트가 말한 ‘이미지의 전기biography‘는 모두 이 ‘바탕’과 인접한 개념이다. ‘바탕’이 이러한 개념에 더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바탕은 이미지의 어디에 거주하는가?” 어떤 작품에서 바탕은 표면에 가시화되고, 어떤 작품에서는 화면 바깥의 맥락에 머문다. 이 글에서는 내재적 바탕과 맥락적 바탕의 구별로서 전시를 읽을 것이다. 이는 AI 이미지와의 차이를 검토하기 위한 ‘바탕’이기도 하다. 전시의 의의와 한계는 사진이 그 바탕을 어떻게 드러내며, AI를 어떠한 대립항으로 호출하는지를 함께 살필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

  2. 이 표현에는 비평적 긴장이 포함된다. 작가이자 큐레이터인 구본창은 자신이 선택한 사진가들 사이에 자신의 작품을 선별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사물사진을 한국 정물사진의 한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전시는 후배 작가를 소개하는 자리인 동시에 구본창 자신의 역사적 위치를 다시 조정하는 장이다. 큐레이션은 타인의 작업을 드러내는 행위이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기준으로 연결하는가를 통해 큐레이터 자신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3. 사진의 ‘물질성’은 그 바탕이 이미지 표면에 정착한 대표적 사례이다. 검 프린트의 두께, 설탕이 굳고 녹는 흔적, 조립된 잔해의 균형은 화면 안에서 직접 확인되는 내재적 바탕이다. 반면 수집의 역사, 유족의 증언, 작가의 발언처럼 이미지 바깥에서 작품을 지탱하는 조건은 맥락적 바탕이다. 《진동》은 두 종류의 물질성, 즉 사진에 등장하는 사물의 물질성과 사진 자체의 물질성을 교차시키는데, 이 교차는 곧 두 바탕이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김수강의 병과 종이봉투는 낡고 평범한 피사체인 동시에 검 프린트의 두터운 표면을 통해 다시 물질화된다. 구성연의 보석은 촬영 전에 설탕 조각으로 만들어지고, 촬영 이후에는 매끄러운 사진 표면 속에서 실제 장신구처럼 보인다. 정정호의 문서와 유품은 역사적 증거인 동시에 새로운 배열을 통해 촬영된 조형적 구조가 된다. ↩︎

  4. 물론 사후, 관찰, 가치 구성이라는 이러한 삼분법은 작품 내재적 분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품 독해를 돕기 위한 임시 장치다. 이 도식은 차이를 조명하는 동안에만 유효하며, 작품을 도식에 봉합하려는 시도는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

  5. 다만 구본창의 상자에서 관객이 화면으로부터 읽어내는 것은 눌린 안감과 빈 공간까지다. 그 흔적을 특정 보석의 상실, 작가의 오랜 수집사, 삶과 죽음에 관한 작업사와 연결하는 관계망은 대체로 화면 바깥에 거주한다. 즉 이 작업의 힘은 상당 부분 맥락적 바탕에 의존한다. 이는 결함이 아니라 이 작업이 작동하는 방식이지만, 뒤에서 AI 이미지와의 차이를 검토할 때 다시 돌아와야 할 지점이다. ↩︎

  6. 배열의 미적 완결성이 역사적 불확실성을 너무 쉽게 봉합하지 않느냐는 문제는 분명 남는다. 전쟁과 강제된 노동의 파편이 아름다운 정물로 정돈될수록, 관객은 역사적 폭력보다 화면의 균형에 먼저 매혹된다. 이 작업 역시 바탕의 상당 부분이 조사의 이력과 작가의 서사 등 화면 밖에 놓여 있는 까닭에, 사실상 구본창의 상자와 같은 종류의 조건 위에 서 있다. ↩︎

  7. 이 변화가 죽음을 새로운 물질적 상태로 보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과 부패가 아름다운 표면으로 정제되는 위험도 발생한다. 검은 꽃과 과일은 소멸의 불쾌한 냄새, 끈적임, 균류와 벌레의 감각을 제거하고 시각적으로 통제된 형상만 남긴다. 사진은 소멸을 기록하는 동시에 그것을 감상 가능한 미학으로 길들인다. ↩︎

  8. 앞서 삼분법을 임시적 장치라 밝힌 이유가 여기에 있다. ↩︎

  9. 다만 이 차이가 어디에 놓이는지는 따질 필요가 있다. 설탕의 취약성이 사진 표면의 광택과 이루는 긴장은 화면 안에서 감지되므로 내재적 바탕에 속하지만, 그 광택이 ‘곧 무너질 설탕’의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재료에 대한 사전 지식, 곧 맥락적 바탕을 요구한다. 구성연의 작업은 두 바탕이 한 화면에서 맞물리는 사례다. ↩︎

  10. 마거릿 보든(Boden, 1998)은 AI가 익숙한 요소를 새롭게 결합하는 조합적 창의성, 주어진 개념공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탐색적 창의성, 개념공간의 규칙 자체를 바꾸는 변형적 창의성을 구분했다. 보든은 AI가 새로운 결과를 생성하는 것보다 그 결과를 평가하는 일을 자동화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보았다. 다만 보든이 말한 ‘평가’는 일차적으로 시스템이 자기 산출물의 신규성과 가치를 스스로 사정하는 인지 능력을 가리키며, 이 글이 말하는 작가의 책임 있는 선택과 곧바로 같지는 않다. 전자를 후자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확장이지만 자동적 등가는 아니다. ↩︎

  11. 이 반론은 《진동》의 의미를 더 세심하게 조각해낸다. 전시가 옹호하는 것은—그리고 이 글이 ‘바탕’이라 부르는 것은—사실상 맥락주의적 예술론에 속한다. 작품의 정체성이 지각 가능한 표면만이 아니라 그것이 놓인 역사·범주·의도의 맥락에서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채터지의 논거는 이 입장을 지지하는 동시에 압박을 주기도 한다. 효과가 관객의 해석과 감응에서도 발생하고 두 이미지가 지각적으로 동일하다면, 남는 차이는 작품-경험 내부가 아니라 외적 맥락에 놓이기 때문이다. 지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두 이미지 앞에서 관객이 제작 맥락에 접근할 수 없다면, 남는 차이는 이미지 안이 아니라 이미지 바깥일 수밖에 없다. 김수강의 검 프린트 표면, 구성연 설탕의 취약성, 조성연이 조립한 잔해의 불안정한 균형처럼 바탕이 표면에 새겨진 작업은 이 도전을 상당 부분 견딘다. 반면 구본창의 빈 상자나 정정호의 아카이브에서 관계의 상당 부분은 수집의 역사, 유족의 증언, 작가의 발언처럼 화면 밖에 거주한다. 이 경우 ‘바탕’은 작품에 내재한 성질이라기보다, 작품에 동반되어야 비로소 작동하는 맥락적 조건에 가깝다. 이는 약점이라기보다 전시가 실제로 말하는 바에 가깝다. 전시가 옹호하는 가치의 상당 부분이 이미지 안이 아니라 이미지를 둘러싼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보다 명시하는 편이 정직하다. 전시가 이 두 종류의 바탕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언어로 상찬할 때, 오히려 논의의 정확성이 약해진다. ↩︎

  12. 《구본창의 항해》를 대상으로 한 관람객 연구(심소나 외, 2024)를 이러한 전환의 수용 맥락을 보여주는 색채로 참고할 수 있다. 이 연구는 구본창의 작업이 개별 사진의 조형성뿐 아니라 생애, 아카이브, 한국 사진사의 서사와 함께 수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즉 관람객은 한 장의 백자나 빈 상자만 본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작가의 긴 항해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함께 보았다. 이는 앞서 말한 ‘맥락적 바탕’이 실제 수용에서 작동한 정황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