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적 모방의 천재들

2024년 9월 3일 4339자 완독 3분 소요

예술에서 모방의 역사는 길다. 모방 이외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오늘날조차, 화가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석고상을 모방하는 기법이다. 예술가에게 모방이란 그만큼이나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임이 틀림없다.

음악에서는 자연을 모방하는 기술이 그렇게까지 추앙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음악적으로 생생히 묘사해 낸 사례가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은 이 대목에서 자주 인용되는 작품이다. 2악장 말미의 꾀꼬리 소리나 몰아치는 폭풍우를 묘사한 4악장의 음향은 보이지 않는 장면을 자연스레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우리 음악가 중 이 분야의 대가라고 한다면 단연 백결百結이 아닐까. 거문고로 방앗소리를 흉내 내어 명절 떡 찧을 여유가 없던 부인을 위로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결국 아끼던 거문고를 팔아 생계에 보탤 수밖에 없었던 백결은 대나뭇잎으로 바람 소리를 흉내 내는 신기를 선보였다고 한다. 과연 청각적 모방의 대가라 할 만한 이야기다.

그러나 아무래도 모방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는 분야는 시각 예술일 것이다. 뛰어난 시각적 모방 능력이야말로 훌륭한 예술가의 자질처럼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당장 우리에게도 솔거率居의 일화가 전설처럼 남아 있다. 그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그림이 너무나도 사실적이었던 탓에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 했다는 것. 이제는 통속 소설의 클리셰만큼이나 진부하게 들리는 이야기다.

▲사진: 제욱시스는 사실적 모방의 대가로 여겨졌다. 제욱시스의 일화를 묘사한 프랑수아 앙드레 빈센트의 1791년 작품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욱시스라는 화가가 이러한 능력을 뽐냈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항하여 파라시우스라는 자가 대결을 청했다. 코웃음을 치며 도전을 받아들인 제욱시스. 휘장 아래에 드러난 그의 그림은 과연 생생하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보는 사람들을 모두 감탄하게 했다. 그러나 제욱시스는 이내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으니, 파라시우스는 무려 휘장을 그려 놓았던 것이다. 둘러선 군중은 물론이요 제욱시스조차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파라시우스의 모방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감탄을 불러일으킬까? 다시 말해 파라시우스가 모방한 휘장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 사실성을 지니고 있을까? 대상을 똑같이 따라서 그렸다면 당연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것이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을 모방한 예술의 사실성이란 단순히 판단하기만은 어려운 문제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처음 접한 어느 원시 부족민들이 사진에 찍힌 이미지를 당최 이해하지 못한 일화는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사진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어리둥절한 이야기지만, 사진 역시 입체의 현실을 평면의 종이에 표현한 매체라 생각한다면 그리 놀랄 것도 없는 이야기다. 현실을 평면에 구현한 작품의 사실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해석이 필요하고, 이 해석은 사회 문화적 맥락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파라시우스의 작품은 전설로만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그 진면목을 감상할 방법이 없다. 어쩌면 이것은 파라시우스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원문: 한국투데이 최은광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