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인상주의였지만 음악에 도입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드뷔시의 첫 인상주의 작품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발표되고 20년이나 지난 시점에 비로소 등장했다. 이때쯤 미술계의 인상주의는 이미 시들해져 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나 늦어졌을까? 19세기 들어 대중과의 접점을 찾기 시작한 미술과는 달리 음악을 향유하는 계층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화구 값이 내려간 반면 악기값은 그대로인 것도 문제였다. 폐쇄적 형식을 당장 깨뜨려야 할 유인이 없었던 것이다. 예술 바깥의 요인이 예술 형식의 변화에 주는 영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음악에서 본격적으로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 무렵으로 평가된다. 이후 음악적 인상주의의 발전은 특히 프랑스가 주도했다. 이 뒤에 있었던 인물이 드뷔시Claude Debussy였다.
드뷔시 이전에도 인상주의에 관심을 보인 음악가는 분명 있었다. 특정 장면의 분위기를 묘사하려는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의 교향곡에서 선명한 인상주의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조성을 무너뜨린 채로 실험적인 불협화음을 이어가는 바그너Richard Wagner의 악극은 또 어떠한가?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다소간 별난 취향처럼 폄하되었다.
여러 전조가 있었음에도 드뷔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상주의를 논하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일단 그가 전통 음악의 판을 엎어버린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인상주의자들이 뒤흔들고 지나간 미술계가 어떠했던가? 화가들은 두 번 다시 옛 방식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드뷔시가 벌인 일도 이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그게 무엇이었을까?
일단 이것은 형식에서의 탈피라 말해볼 수 있겠다. 고전 시기의 음악을 대표하던 것은 단단하고 완벽하게 마무리된 음악적 형식이었다. 드뷔시는 이를 거의 모든 관점에서 타파해 나갔다. 화성을 자유로이 전개하여 조성 체계를 무너뜨리고, 흐릿한 박자로 음악적 구조를 짜부라뜨렸다. 형식을 벗어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유다. 드뷔시는 음악가들에게 자유를 선물한 것이다.
더 본질적으로 평가하자면, 드뷔시가 해낸 일은 이성에서 감각으로의 전환이었다. 드뷔시의 초기 대표작인 〈목신의 오후 전주곡Prélude à l’après-midi d’un faune〉과 〈달빛Clair de Lune〉 등은 음의 미묘한 배열만으로 시각적 효과를 달성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인상주의 회화가 빛과 색을 다루었던 방식과 유사한 시도다.
오늘날의 청중에게 이는 다소간 새삼스러운 이야기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서양 음악이 음표로 성을 쌓는 듯 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드뷔시의 시도에는 분명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 우리에게 인상주의적 기법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오히려 자유를 누리려는 드뷔시의 혁명이 제대로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드뷔시의 유산은 대중음악과 그 접점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클래식 음악과 가까운 지점에서는 한스 짐머Hans Zimmer를 꼽아볼 수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음악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다. 보다 먼 곳에는 라디오헤드Radiohead와 같은 팝 그룹이 있다. 이들이 잘 사용하는 몽환적인 선율에 〈목신의 오후 전주곡〉의 향기가 물씬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