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의론 (1) – 모방론, 예술은 현실의 완전한 복제품

2024년 9월 30일 5924자 완독 4분 소요

모방론은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 발전한 이론이다. 그만큼 오래되었다. 이론이 설명하는 바도 어려울 것 없이 직관적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 세계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다.

물론 모방론의 실제 사정은 조금 복잡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모방론이 예술을 찬양하기 위해 활용된 이론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방론은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라 답하고 있을 뿐, 그것이 좋은 예술이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단 두 유형의 모방론자가 있을 수 있겠다. 현실을 모방한 예술이 좋다는 사람, 그리고 그런 예술이 나쁘다는 사람.

플라톤은 후자 쪽이었다. 플라톤에게는 ‘모든 사물이나 이념의 궁극적인 실체’라는 개념이 있었다. 일종의 이상향으로, 플라톤은 이를 ‘이데아idea’라 불렀다. 같은 철자를 가진 영단어의 어원인데, 오늘날 이 단어는 ‘관념’으로 번역된다.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이데아나 관념이나 마찬가지다. 플라톤에게 현실이란 이데아를 모방한 결과물로서 질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예술? 예술은 그런 현실을 다시금 모방한 결과물이다. 그야말로 저질인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조금 낫게 평가한다. 오늘날 잘 알려진 ‘카타르시스katharsis’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왔다. 이것은 희곡, 그중에서도 비극悲劇을 평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현실을 모방한 비극을 보며 사람들이 울고 공감하는 동안 감정의 정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정화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다.

▲사진: 아그리파의 흉상. 출처: Unsplash

르네상스 시기에 오면서 모방은 훌륭한 예술작품의 기본 조건으로 승격한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대와 르네상스 사이에는 중세가 있다. 중세는 성서의 교리가 지배하던 ‘신의 시대’였다. 한 시대는 보통 앞선 시대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다. 르네상스는 신의 시대에 반발하여 ‘인간의 시대’를 열었다. 자연스레 인간이 머무는 현실 세계가 좋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급기야는 현실이야말로 완전한 기준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예술이란? 완전한 기준인 현실을 완벽하게 모방한 예술이다.

그런데 모방이란 시각예술에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회화란 입체로 되어 있는 실물을 평면에 옮겨 놓아야 하는 작업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을 ‘시공간’이라 부른다. 하지만 모방의 결과물로 복제해 낸 회화에는 시간 개념을 집어넣을 여지가 없다. 있다 한들 한 시점에 고정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현실을 모방해야 하는 예술가의 처지에서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눈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이게끔 하는” 트릭을 개발해 낼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플라톤 선생이 재소환된다. 모방론을 따르는 예술가는 어떻게든 현실 세계를 최대한 가깝게 모방하려 하지만, 이것은 비판하는 입장에서 “똑같은 것처럼 보일 뿐, 사실은 우리 눈을 속이는 기만에 지나지 않는” 행위일 따름이다. 예술이 사실은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나 떨어져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도덕이 없다는 것.



그러나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 이런 비판은 구태여 제기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되었다. 표현 주제에 대한 예술가의 주관적인 해석, 창조적인 상상력, 이러저러한 상징적 기법 등이 예술에서 더욱 중요한 것으로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방을 뛰어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훌륭한 예술가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방론은 여전히 건재하다. 미술 학원에서는 여전히 아그리파의 흉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작업으로 예비 화가의 첫발을 인도하며, 이러한 절차에 의문을 표하는 이는 드물다. 동시대 예술조차 그 밑바탕에 모방론적 단련이 기초해야 한다는 믿음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피카소의 사진과도 같은 묘사 능력이 ‘그가 천재인 진짜 이유’로 새삼 회자하기도 한다.

이것은 오랜 예술의 역사에서 대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나의 신화다. 하지만 기본적인 소묘 훈련조차 받지 않은 이들이 예술계에서 문제없이 우뚝 서곤 하는 오늘날 이 신화가 얼마나 유효한 것인지는 별로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는 듯하다.

원문: 한국투데이 최은광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