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의론 (2) – 표현론, 예술은 감정의 언어

2024년 10월 21일 5053자 완독 3분 소요

표현론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할까? 표현론의 관점에서 예술이란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보통 그 표현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것은 ‘감정’이다.

정리해 보자. 예술 정의론으로서 표현론은 예술작품이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데서 가치를 지닌다는 이론이다. 표현론자는 예술가가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여 관객을 정서적으로 고양하는 작품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예술이 추구해야 하는 바를 작품 외적인 미에서 작가의 내적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로 옮겨놓았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솔직히 말해 모방론적 예술은 지루하다. 물론 대상을 모방하려는 욕구는 무척 강렬한 것이며, 무언가를 아주 똑같이 묘사한 작품을 볼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미적 쾌감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다. 사람이 똑같은 걸 보고 두 번 놀라겠는가?

그렇지만 무언가를 모방하려는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이라 잘 사라지지 않는다. 서양미술의 긴 역사를 들여다보자면, 보통 모방론적 예술이 한참 득세하다가 잠깐 매너리즘에 빠질 무렵 표현론적 경향이 조금씩 머리를 내밀곤 하는 경향이 있다. 표현론이 본격적으로 미술사에 등장한 것은 근대로서, 20세기 초엽이다.

근대? 20세기? 어딘지 익숙한 용어이지 않은가? 그렇다. 역시나 인상주의다.

▲사진: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을 보자. 이 작품을 두고 밤하늘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보이는 대로’ 그렸다고 말할 수는 있다. 평범한 눈이 아니라 예술가의 눈으로 본 하늘인 셈이다. 이를 표현해낸 작품이 어떻게든 감정을 환기하기 시작하면, 이는 표현론자의 입장에서 예술작품이 된다.

표현론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표현론을 비판하는 이들도 “예술작품이 감정을 환기한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관객을 감동케 하는 작품이 분명히 있다. 다만 이들은 그렇듯 환기된 감정이 부적절한 경우를 문제 삼는다. 이 지점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다.

리펜슈탈은 히틀러에게 지원받아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었다. 나치의 어용 예술가로 부역한 것이다. 나름 예술 지망생이었던 히틀러의 눈에 리펜슈탈의 영상이 제법 그럴듯했던 모양이다. 당대의 최신 촬영 기법을 도입한 리펜슈탈의 영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세련되었다고 평할 지점이 있다. 당시 이 영상을 본 나치당원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들 과장은 아닐 성싶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지점이 뭘까? 리펜슈탈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표현론적 작품이다. 이를 보듯 표현론은 정치에 악용될 수 있다. 리펜슈탈의 영상을 보고 감동한 누군가는 나치에 입당할 수도 있고, 전쟁에 참여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다소간 궁색한 주장이다. 예술작품이 어떤 의미로든 대중을 선동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 온 일이다. 반표현론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작품들은 예술로 인정하지도 말아야 하는가? 아니면 적어도 이런 것들은 ‘나쁜’ 예술작품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가?

한편, 표현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예술의 순수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술은 다른 목적에 이용되어서는 안 되며,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수단에 봉사하는 예술’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관대해졌다. 그리하여 순수한 예술에 대한 신념은 거의 도그마처럼 되어 버렸다.

이래저래 오늘날 반표현론이 설 자리는 좁아지는 형국이다.

원문: 한국투데이 최은광 칼럼